
내가 한 짓을 후회하거나 죄책감을 느껴서가 아니다. 난 후회하지도,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내가 저지른 살인마다 이유가, 그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 이렇게 가슴이 아픈 까닭은 외로움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내가 아는 사실을 공유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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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74개의 문장
내가 한 짓을 후회하거나 죄책감을 느껴서가 아니다. 난 후회하지도,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내가 저지른 살인마다 이유가, 그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 이렇게 가슴이 아픈 까닭은 외로움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내가 아는 사실을 공유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외로움.
사이사이 지나가는 천진하고 충만한 순간들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생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그래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중립의 시간이 있다. 그 어떤 불행의 현실도 이 불연속적 순간들, 무소속의 순간들, 뉘앙스의 순간들을 장악할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다. 그래서 불행의 현실들 속에서도 생은 늘 자유와 기쁨의 빛으로 빛난다.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한겨레출판, 2018) 중에서
오늘 다가온 잠잠한 마음은 오늘의 단어가 될 것이다. 그 단어들을 모아보면 그제서야 펼쳐지는 지난 이야기들이 있지 않을까 , 그 이야기들을 책을 대하듯이 어루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 또한 아는 단어, 아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가 문득 멈추게 만드는 단어 하나가 있다면 읽기를 멈춰도 좋다. 대신 읽게 될 내 이야기가 내 안에서 펼쳐질 때, 나는 나에게 숙인다. 책을 읽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순간 책은 그저 고마운 존재가 된다.
책을 알아가는 건 재미있는데, 아무래도 나를 알아가는 데에는 큰 재미를 느끼기가 어렵다. 나를 이렇게 보면 어떨까. 책을 대하듯이 나를 대하면 어떨까. 나는 왜 책 앞에서만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내가 되는 걸까. 나 스스로를 앞에 두고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선은 매일 아침 새로이 만니는 나를 느리고 낮설게 읽어나가면 어떨까.
조급한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지. 일의 과정이 쏙 빠지게 된다. 조급한 사람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급하게 이루어지는 관계 앞에 서면 얼굴의 표정도 표면도 딱딱해지게 마련이다. 지금을 즐기며 조금 늦더라도 이 순간에 대해 알아가는 대화 방식이 좋은 건, 우리 안의 것들을 하나씩 세심히 바라보는 자세가 결국 관계를 만든다. 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하루와, 오늘 만난 하루, 그리고 다음이 될 하루에 가장 걸맞은 문장을 찾아나서는 일이 직업이 된 후로, 나는 책만 읽으면 곧장 문장을 잃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쓴 나의 문장보다 타인에게서 우러나온 전혀 다른 맥락의 문장이 나를 대변할 때가 있다. 그럴 땐 마치 지각생이 된 기분을 겪는다. 늦은 줄도 몰라 숨이 차지 않는 지각생이 되어 멀뚱멀뚱하게 먼저 쓰인 문장을 바라본다.
좋아서일까 두려워서일까. 어느 쪽으로 의미를 부여해도 괜찮을 ‘두근두근’의 순간. 다음을 모르는 이야기를 한 글자씩 밟아나갈 힘이 생기는 좋은 문장은 때때로 찾아온다.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인데, 책을 중심으로 여러 형태의 직업인이 되는 나는 이런 순간에 제각각의 두근거림을 느낀다.
소설가 하야시 후미코가 『슬픈 인간』(봄날의 책, 2017)에서 말했다. “마음이 끓어오를 때 자연스럽게 끓어오르게 하며, 차분히 필사적으로 써낸 작품이야말로 오래 살아남아 독자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올해도 생일을 축하할 수 있어서 기뻐.” 십 년 뒤에도 꼭 이렇게 말하고 싶다.
“생일 축하해. 십 년 뒤에도 꼭 이렇게 말할게.” 삶을 살아내는 힘은 단지 지금 일어나 마주하는 것들만으로 생기는 게 아니라고 나는 확신했다. 십 년 뒤에도 꼭 이렇게 말할 거라고 약속하던 친구의 말이 나에게 절절하게 와닿기까지는 이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십 년 뒤에도 친구가 나에게 말을 걸어줄 거라는 짧은 약속은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살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