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오는 적극적인 불만이오, 질투는 소극적인 불만이다. 질투가 그렇게 금세 증오로 바뀌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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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13개의 문장
증오는 적극적인 불만이오, 질투는 소극적인 불만이다. 질투가 그렇게 금세 증오로 바뀌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자연은 계속 가라고 말하고, 문화는 멈추라고 말한다. 자아는 이기적인 충동과 그것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득 차 있고, 수많은 내적 갈등은 결국 충동과 억제 간의 대립이 된다. 그 갈등은 아마도 인간 심리에서 가장 기본적인 갈등일 것이다.
과거에도 여러 차례 사람들은 특정 감정에 지배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 18세기의 작가들은 그들 시대에 넘쳐흐르는 연민과 친절을 말했고, 1940년대에 W. H. 오든은 '불안의 시대'를 이야기했다. 마치 각 시대마다 어떤 전염성 있는 감정이 잡작스럽고 기괴하게 발발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 그 특정 감정은 온갖 종류의 욕구와 두려움이 합쳐지는 중심점 역할을 할 뿐이다.
배우로서 보면… 즐겁지 않아요. 모든 역할이 그래요. 어떤 역할을 한다는 건 고통이에요. ⸺ 고통 속에 스스로 투신하는 것이죠. 왜 자꾸 그 속에 본인을 밀어넣는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행복한 적이 없어서 고통이 편한 거 아닐까? 모르겠어…. (잠시 침묵)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들을, 나를 그리고 먼저 떠나간 사람들 위해서…. 누군가의 희생이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거죠. 어떤 인물, 역할을 이해한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나는 상실이 한국 사회의 일상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때로는 감춰진 슬픔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로부터 생긴 멜랑콜리함이 곧 이 세계의 정서가 아닌가 싶다. 동시에 우리는 끊임없이 삶의 작은 달콤함을 찾아서 살아가려고 애쓴다. <파과>도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철저하게 단련된 존재처럼 보이기에 이 캐릭터의 아킬레스건은 무엇일까를 더 생각하게 했다. 독일 문학처럼 하나의 운명 또는 필연으로서 몰락하고, 이를 통해 회복하는 구조가 이 이야기에도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Al 영화를 둘러싼 담론은 아직 너무 먼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죠. AI는 그 먼 길을 순식간에 도달합니다. 아서 단토는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이러한 예술의 종말은 곧 해방이라'고 했습니다. 연기로부터 해방된 배우. 촬영으로부터 해방된 감독, 극장으로부터 해방된 관객까지.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캔버스를 빼앗긴 화가처럼 우리 앞에 섬뜩한 자유가 기다립니다.
마르셸 뒤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술을 믿지 않는다. 예술가를 믿을 뿐이다." 영화는 크게 변할 것이고 관객도 크게 변할 겁니다. 하지만 예술의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사진에 밀린 미술이 풍경이 아닌 내면과 관념을 그리기 시작한 것처럼 예술가들은 영화를 넘어 뭔가의 뭔가를 만들어낼 것이고 우리는 그 뭔가의 뭔가를 감상하겠죠. 그 뭔가의 뭔가가 '영화'라고 불릴지, 고작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질병은 삶을 따라다니는 그늘, 삶이 건네준 성가신 선물이다. 사람들은 모두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 이 두 왕국의 시민권을 갖고 태어나는 법, 아무리 좋은 쪽의 여권만을 사용하고 싶을지라도, 결국 우리는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우리가 다른 영역의 시민이기도 하다는 점을 곧 깨달을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좋아하는 영화랑 우리들이 찍고 있는 영화가 연결되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정말 가끔이지만... 그게 좋달까.